인도 카스트 인구조사 (식민지 유산, 숫자의 정치, 정체성 고착)

2027년, 인도가 약 100년 만에 카스트 신분을 인구조사 항목에 포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드디어 불평등을 제대로 측정하겠다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 숫자가 오히려 사람을 가두는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데이터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 사안은 단순한 행정 통계가 아닌 인도 사회 전체의 미래를 가를 분기점처럼 느껴졌습니다. 식민지 유산: 측정이 현실을 만들어낸 역사 카스트(Caste)란 인도의 전통적 신분 체계로, 브라만(성직자)부터 불가촉천민(Dalits, 달리트)까지 위계적으로 구분된 사회 집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카스트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고정된 체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 이전 인도에서는 지역마다 위계와 명칭이 달랐고, 경제적 성취나 왕조의 후원에 따라 집단의 지위가 이동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변화는 1871년에 일어났습니다. 영국 식민 정부가 행정 편의를 이유로 종교와 카스트를 인구조사에 포함시키면서, 유동적이었던 집단 정체성이 공식 문서 위에 고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과거 프로젝트에서 사용자 데이터를 정교하게 범주화하면서 겪은 일이 떠오릅니다. 분류가 세밀해질수록 사용자는 그 카테고리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정작 그 틀 바깥의 다양한 가능성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영국의 카스트 인구조사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측정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측정이 현실을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개념과 닮아 있습니다. 수행성이란 어떤 분류나 범주가 단순히 현실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행동과 정체성을 실제로 형성해나가는 현상을 뜻합니다. 1931년까지 이어진 식민지 카스트 조사는 이 수행성의 교과서적 사례였고, 그 결과 인도의 카스트는 행정 문서 속에서 더...

AI 에이전트 시대, 한국의 선택 (자율 에이전트, 도메인 지식, 산학연)

SAP의 시가총액이 3,400억 유로에서 1,900억 유로로 반 토막 났습니다. 세일즈포스와 워크데이도 같은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AI가 그 소프트웨어마저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흐름을 멀리서 관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자들의 요청이 "정보 검색"에서 "업무 대행"으로 바뀌는 걸 매일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한국에 어떤 기회이자 위협인지, 제가 직접 느낀 것들을 토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자율 에이전트: 도구에서 실행자로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이란 방대한 데이터로 사전 학습된 초대형 AI 모델을 뜻합니다. GPT나 클로드(Claude)처럼, 특정 과업에 맞게 재훈련하지 않아도 다양한 작업을 소화할 수 있는 범용 기반 모델입니다. 2011년 마크 앤드리슨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고 있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이 모델들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AI는 규칙 기반 시스템에 가까웠고, 학습 데이터를 보정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느끼기엔, 분기점이 온 건 2023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사용자들은 "이 공식이 맞나요?"처럼 단순 확인 질문을 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계약서 검토하고 리스크 정리해줘", "경쟁사 세 곳 분석해서 전략 초안 잡아줘" 같은 요청이 일상이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율 에이전트(Autonomous Agent)로의 전환입니다. 자율 에이전트란 인간이 목표만 제시하면 세부 실행 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하위 작업까지 자동으로 처리하는 AI 시스템을 말합니다. 앤스로픽이 출시한 클로드 코드(Claude Code)와 클로드 코워크(Claude Cowork)는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개발자가 코드 전체를 직접 짜던 시대에서, AI가 목적을 이해하고 코드를 생성·수정·배포하는 ...

송전망 공사와 산림 훼손 (감시 공백, 토사 유출, 환경 윤리)

국가가 수조 원짜리 전력망을 깔면서 흙자루 하나 제대로 못 쌓았다면, 그건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230km 송전 공사 현장에서 허가 면적을 초과한 산림 훼손이 확인됐습니다. 강원도 산간을 여행할 때 산허리가 잘려 나간 자리에 박힌 철탑을 보며 '저게 도시를 밝히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저로서는, 이번 사안이 단순한 행정 실수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4조 6천억짜리 공사, 현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이 공사의 정식 명칭은 500kV 초고압 직류 송전(HVDC) 사업입니다. HVDC란 High Voltage Direct Current의 약자로, 쉽게 말해 교류(AC) 방식보다 장거리 전력 수송 시 손실이 적은 직류 방식의 초고압 송전 기술입니다. 기존 교류 방식으로는 강원에서 수도권까지 전력을 보내면 손실이 크지만, HVDC를 쓰면 그 손실을 상당히 줄일 수 있어 차세대 송전 인프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노선은 경북 울진군을 출발해 봉화군, 강원 삼척시·영월군, 경기 양평군을 지나 가평군까지 이어지는 230km 구간입니다. 이 경로 대부분이 산악지대이고, 철탑 431기를 세우는 규모입니다. 총 사업비는 4조 6,000억 원으로, 국책 사업 중에서도 단연 핵심 프로젝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환경 시민단체인 녹색연합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경북 울진·봉화군과 강원 삼척시 일대 37곳에서 허가받은 면적을 넘는 산림 훼손이 발생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철탑 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토사 유출 방지막, 즉 흙자루를 충분히 쌓지 않아 빗물과 함께 토사가 쓸려 내려간 것입니다. 제가 현장 사진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건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아니라, 그냥 안 막은 거잖아"였습니다. 감시 공백이 불러온 구조적 문제 이번 사건에서 저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건 훼손 자체가 아니라, 정부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행정 당국이 허가 면적 초과 훼손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국책 사...